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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루니쿠스의 지동설

by 매니스 2022.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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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루니쿠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었으며 재능도 뛰어났던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에서는 천문학, 파도바에서는 의학, 그리고 페라라에서는 법학 등을 공부하며 이탈리아의 여러 학교에서 다양한 학문을 탐구했다. 그는 훗날 유럽여러 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 의학 등을 강의하기도 했다. 생애의 대부분을 폴란드 프라우엔부르크 대성당의 참사회 의원으로 지낸 코페르니쿠스는당시 학자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가톨릭교회의 후원으로 교육을 받거나 경력을 쌓았다. 1506년에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운행에 대하여 자신이 직접 관측하고계산한 자료를 토대로 새로운 천문학 체계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뮐러와 마찬가지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자신의 관측과 맞지 않는다는 것도금방 깨달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술은 성경〉의 내용과 일치했다. 지구가 지구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 자전한다거나,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고보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중력의 개념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고, 코페르니쿠스 역시 물체가 지구를 향해 떨어지는 것은 물질이 자연적으로 우주의 중심, 즉 지구의 중심 쪽으로 끌어당겨지기 때문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반박할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만약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면, 왜 물체가 지구에서 태양 쪽으로 떨어지지 않는지'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지구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리는 이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신이 인간을 우주의 중심이자, 우주에서 가장 큰 천체에 두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1514년에 코페르니쿠스는 교황의 비서로 임명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과거 뮐러를 곤란하게 한 달력의 오류를 찾아 고치는 임무를 맡았다.코페르니쿠스는 당시의 누구도 의심치 않던 신성한 사상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관측 결과를 설명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었다. 가톨릭과 신교도의 대립으로 교회가 가톨릭의 가르침을 더욱 엄격하게 유지하려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교회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다. 결국 그는 지구와 태양 그리고 달의 관계가 완전하게 설명되기 전에는 그 오류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변명하며 교회의 요구를 거절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정부와 교회에서 다양한 요직을 거치면서도 비밀리에 자신의 이론을 다듬어 나갔다. 1519년에서 1521년까지는 유럽 변방에 위치한 폴란드의 에름란트 교구를 복구하는 데 조력했고, 에름란트 교구의 주교 대리로서 봉직했다. 또한 이 지역의 의료 구호 체계를 마련하는가 하면, 1522년에는 이 지역의 통화를 개혁하기 위한 계획도 내놓았다. 시간이 흘러 자신의 관측 자료가 정확하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친구들의 격려까지 더해지자, 코페르니쿠스는 1530년에 지동설을 간략하게 추려서 주석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발견을 주제로 강의했고, 동료들은 그에게 지동설을 완전하게 풀어 쓴 책을 출판하라고 강력하게 권했다. 이러한 지지와 교황 클레멘스 7 세의 암묵적인 승인에도 불구하고, 코페르니쿠스는 당시에 지배적이던 우주론을 정면에서 비판하는 데 소극적이어서 지동설 전체에 관한 책을 출판하는 것은 주저했다. 그러다가 1540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기념비적인 업적을 책으로 출판했다. 바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보통 공전이라 불리는 책이었다. 뇌졸중과 마비증세로 병석에 있던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5월 24일에 이 책의 견본을 받아 보고,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6부로 구성된 『공전은 지동설에 대한 자세한 설명서이다. 책이 출간된 이후에도 지구가 둥글다는 데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 책은 처음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못 박았으며 우주는 무한하다.고 주장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6개의 행성이 지구가 아닌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지구도 이 눈에 보이는 신'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동시에 자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행성의 궤도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타원이 아닌 수정구의 표면을 도는 완벽한 원이라고말했다. 이는 당시의 측정 자료가 조악했고, 우주에서 각 행성 사이의 거리의와 속도, 크기가 완전하게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 없이 각 행성(planet' 의 어원은 방랑자'라는 뜻의 그리스어이다)이 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했다(사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은 수정구모형에도 맞지 않았다). 그리고 지구에서 볼 때 별들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는데 행성은 왜 위치가 변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공전은 달력의 오차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이 왜 맞지 않게 보이는지도 설명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인정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천문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는 움직이는데 왜 심한 바람이 불지 않는지, 별의위치 변화는 왜 감지되지 않는지, 사람을 포함해 모든 물체가 왜 지구의 표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지 설명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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