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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상업의 변화

by 매니스 2022.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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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상업의 변화가 이끌어낸 근대 과학의 발전

15세기 초에 이르자 유럽에서는 변화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조들이 두드러졌다. 사실 가급적 빨리 흑사병의 그늘에서 벗어나 과거를 묻어 버리고자 하는 동기가 매우 강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밝고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는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르네상스, 고전 문학의 재발견으로 특징지어지는 유럽의 부활 그리고 지적 탐험에 대한 커다란 관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르네상스는 과학 혁명이나 세계 곳곳을 향한 지리 탐험은 물론, 경제적,상업적 모험을 가능케 할 기술을 개발하려는 전례 없는 노력까지도 아우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흑사병으로부터 완전히 회복한 나라는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유럽과 근동의 무역이 이루어지는 데 가장 이상적인 길목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1300년대 초반부터 무역에 크게 의존해왔다. 그들은 향료와 향수, 비단 등의 소모품을 동방에서 수입하거나 북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중개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매우 정교한 경영 및 금융 시스템을 발달시켰으며, 금융 전문가들은 1400년대에 들어 이 나라가 독보적인 상업 강국으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피렌체는 국제 금융 및 무역의 최대 중심지였다. 임에 관한 한 권위 있는 책 중 하나였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지한 사상에 흔들림 없는 경의를 보여 주는 위대한 상징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뮐러의 연구는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움직이지 않으며 우주의 중심'이라는 믿음을 처음으로 부인함으로써 천문학 혁명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궤도를 완전하게 일주하려면 365일 5시간 48분 46초 걸린다는 사실은 이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365와 1/4일을 1년으로 쳤다. 그러나 이렇게 계산하면 실제 주기보다 11분 14초가 길어진다. 그래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집트력을 받아들인 1세기부터 달력상의 날짜와 실제 계절 사이의 차이가 점차 벌어졌다. 그러다가 15세기 중반에는 율리우스력이 10일이나 늦어졌다. 농부나 선원들이 그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할 정도였다. 교회에서는 매년 3월 21일인 춘분을 부활절로 정해 왔다. 하지만 이즈음에는 누적된 시간의 불일치 때문에 3월 11일에 춘분이 찾아왔다. 1475년에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 가 뮐러에게 이러한 불일치가 나타나는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뮐러는 그 원인을 찾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자료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얻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은 사회적 안정을 위해서는 든든한 반석이었을지 몰라도 정확한 부활절 날짜를 정하고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는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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