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변화 후에 이뤄지는 것들

by 매니스 2022. 3. 13.
반응형

변화 후에 오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우리 주변의 세상은 변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변화를 보며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을 느낀다.블레즈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특성만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람을 향한 사랑은 인생을 향한 사랑이기도 하다. 우리는 추상적으로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은 모른다. 인생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현실을 통해 사랑한다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사랑하고, 누군가와 보내는 시간을 사랑하는 일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것은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가 변하면 그것을 잃어버린 상실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구체적으로 좋아하는 그 무언가는 결코 지속되지 않는다.미셸 몽테뉴는 “인생은 영원한 시소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 시소 위에서 움직인다. 땅도, 코카시아의 바위도,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불변함이라는 것 자체도 천천히 움직이는 동요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쁨이 내가 몇몇의 사람들을 좋아하고 또 몇몇의 사물들을 좋아하는 데서만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잖이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뿐인가,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사람들과 물건들이 언젠가는 모두 사라져버릴 거라는 생각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수 있다니! 언젠가는 분명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니! 대체 이 지구상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나이가 들면 들수록 향수는 짙어지게 마련이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난다. 그렇게 떠난 사람들은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걸 경험해야 하는 건 그리 달갑지 않다.  우리는 어떤 변화가 닥치면 애도의 감정, 뭔가를 잃었다는 상실감,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집착 등의 감정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 주제는 분명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라는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학자의 연구를 들여다보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누구인가. 일생을 바쳐 인간의 죽음을 연구해 이 분야를 전문적으로 치료할 수 있게 한 사람이 아닌가. 바로 한 인간의 삶을 끝까지 돌봐준다는 것이다. 그녀는 생전에 죽어가고 있는 한 인간의 머릿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해 책을 펴냈다. 이 주제는 정말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의 생각보다 더 격한 변화의 감정을 경험할 수 있을까? 당연히 없다.그녀는 책을 통해 이토록 중대한 변화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5단계를 거친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애도의 5단계이다. 제 1단계는 거부의 단계로 ‘그렇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는 분노의 단계, ‘그렇다 이거지? 다 부숴버릴 거야!’라고 생각하는 단계. 세 번째는 흥정의 단계로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닐 거야’라고 생각하는 단계. 네 번째는 슬픔의 단계, 그리고 마지막은 수용의 단계이다. 가만히 보면 우리 역시 삶에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장애물 앞에서 이 5단계를 거치지 않나 싶다. 꼭 정확하게 하나씩 하나씩 이 모든 단계를 거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지방출장 때문에 공항으로 가기 위해 지금 어느 외곽순환도로 위에 있다고 치자.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갑자기 길이 막힌다. 새벽 6시에 길이 막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뭘 잘못 본 것일 게다. 하지만 정말 교통 체증이다. 사실이다. 화가 난 나는 그만 폭발하고 만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이상하게 허리가 아프더니 이젠 길까지 막힌단 말이지? 해도 너무하는 거 아냐? 별 짜증 나는 일이 다 있군, 그래! 좀 진정하자. 그리고 나는 시계를 본다. 다행히 15분 정도는 여유가 있다. 길이 조금 막힌다고 해서 비행기를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5분이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시간은 벌써 45분이나 지나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들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마 큰 사고가 있어 길이 막히는 것이리라. 결국 난 비행기를 놓치고 만다. 내 바이어가 얼마나 화를 낼까? ‘아, 정말! 이렇게 짜증 나는 일이 다 있군!’ 나는 이제 슬픔에 잠긴다. 그러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해가 저렇게 떴고, 지구는 계속 돌고, 지저귀는 새도 있잖아! 클래식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찾자. 안 그래도 조용히 음악 듣고 싶어 했잖아? 차가 좀 밀린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 나는 상황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는 오늘 일을 잊고 다시 시작할 것이다. 1년이 지나면 오늘 일쯤은 까맣게 잊을 것이다.우리 모두는 이런 식으로 애도의 순간, 몇 시간이면 끝나는 작은 애도의 시간되는 감정이다. 영장류에게 큰 도움을 준 감정이 아닐 수 없다. 호모 사피엔스 역시 다른 영장류와 다를 바 없이 그룹 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살펴보면 인간을 지금껏 생존하게 해준 감정들은 모두 썩 개운치 않은 감정들이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생존하도록 계획된 존재라는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생존하도록 돕는 것은 인간이 행복해지는 데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가 개운치 않은 감정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하는 감정의 노예가 아닐 수 없다. 행복에 관련된 모든 철학과 고민들이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행복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의 해방과도 같은 행위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렇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감정 변화의 올가미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이다. 계몽사상가 베르나르 퐁트넬은 이미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지적한 바 있다.“만일 우리가 달에 산다면, 인간이라고 부르는 이 이상한 창조물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상상이나 할 것인가? 광적인 열정을 가지고 지혜로운 사고를 하는 이 존재에 대해 상상할 것인가? 짧은 시간, 그러나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대부분 필요 없는 것에 대해 연구하고,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자유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나 구속당하기만 하는 이 존재, 행복하고 싶은 욕망은 강하나 그러지 못하는 존재.”  우리는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고 작용하는지 잘 알고 있다. 첫 번째는 무엇인가? 이성이 감정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 할 수 있다고 쳐도 아주 잠깐일 뿐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당신은 지금 무척 화가 나 있는 상태.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조목조목 따져가며 당신은 지금 화를 낼 상황이 아니라고 설명한다고 상상해보자. 말리면 말릴수록 더 화가 나지 않겠는가! 게다가 상대방의 말이 맞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성을 다스리는 뇌가 감정을 다스리는 뇌를 효과적으로 컨트롤할 방법은 없다. 감정을 다스리는 뇌와 이성을 다스리는 뇌를 두고 볼 때, 보통 정보는 감정의 뇌에서 이성의 뇌로 가는 행로를 통해 더 잘 받아들여진다는 연구결과도 있지 않은가. 우리의 감정을 거쳐 사고하고, 추론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반응형

댓글